의정부음주운전변호사 볼셰비키, 우크라 독립 추진 ‘경계’집단농장 반발 농민들 수용소행모든 식량 징발로 최악 상황 몰아굶어 죽거나, 처형당해 죽거나
1932년부터 2년간 400만명 희생우크라가 푸틴을 믿지 못할 이유
“배가 크게 부풀어 올랐고, 목은 새의 목처럼 길고 가늘어졌어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굶주린 유령처럼 보였죠.”
1932~1933년 소비에트연방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300만~4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홀로도모르(굶주림에 의한 멸종)’라고 부른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앤 애플바움이 2017년에 출간한 <붉은 굶주림>(원제: Red Famine)은 홀로도모르가 자연재해가 아니라 소련의 볼셰비키 정권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기획한 참사라는 사실을 800여쪽 분량으로 서술한다.
기근은 먼저 신체를 파괴했다. 굶주린 사람들은 피부가 얇아지고 체내에 수분이 축적된 결과, “맑은 샘물로 가득 찬 유리병처럼” 보였다. 피부는 갈라지고 상처에선 진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앉아서 죽거나 잔디밭에서 놀다가 죽었다. “죽은 마을 주민들이 도로와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시체를 옮길 사람보다 옮겨야 할 시체가 더 많았죠.” 겨우 구한 빵을 먹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너무 굶주린 탓에 몸이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근은 윤리와 인간성도 파괴했다. 어떤 부모들은 굶어서 약해진 자식을 방치해서 죽이거나 목졸라 죽였다. 쇠약해진 사람이 생매장당하는 일도 빈번했고, 식인마저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굶주린 이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그들의 살을 식량으로 사용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됐다. 키이우주에서는 1933년 1월9일부터 3월12일까지 69건의 식인 사건이 발생했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은 더 많을 것이다.
붉은 굶주림앤 애플바움 지음 | 함규진 옮김글항아리 | 816쪽 | 4만8000원
우크라이나에서 왜 이처럼 참혹한 사태가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려면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릴 정도로 풍부한 곡물 생산량을 자랑하는 우크라이나는 18세기 이후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의식이 사라진 적은 없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해 제정이 무너지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립국가를 세울 기회를 맞는다. 1917년 4월 우크라이나인들은 라다(의회)를 구성한다. 그해 11월에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듬해 1월에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공표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레닌과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국가라는 생각 자체를 경멸하는 것이 심지어 혁명 이전부터 볼셰비키적 사고의 핵심에 있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경멸은 러시아 극좌부터 극우까지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리지 않는 러시아인들의 보편 정서였다.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 독립에 적대적이었던 데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는데,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을 신봉했던 볼셰비키들은 ‘계급 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농민을 불신했다.
1919년 집단화와 중앙 계획식 농업에 반발해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은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 ‘특단의 조치(츠레즈비차이니예 메리)’를 취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도록 만든 사건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사회주의는 지지했으나 볼셰비키는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지주가 사라지기를 바랐지만, 스스로 농장과 토지를 갖고 싶어했다. 그들은 집단농장이라는 형태의 ‘제2의 농노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종교, 언어, 관습이 존중받기를 바랐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소련의 산업화를 신속하게 달성하기 위한 내부 식민지로 간주했다. “농민을 더 강하게 쥐어짠 다음 이 ‘내부 축적물’을 소련 공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계획하에 악명 높은 ‘탈쿨라크화’가 시작된다. 볼셰비키는 농민을 쿨라크(부농), 세레드냐크(중농), 베드냐크(빈농) 등으로 나누고 집단농장에 반대하는 쿨라크를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빈농들에게는 쿨라크의 ‘잉여 농산물’을 찾아내 몰수하는 일을 맡겨, 농촌을 ‘내전’ 상태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농촌 파괴 정책으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고 심각한 기근의 조짐이 나타났는데도 스탈린은 멈추지 않았다. 1932년 가을 볼셰비키는 곡물뿐만 아니라 채소와 가금류까지 포함한 모든 식량에 대한 징발을 명령했다. “(스탈린의 명령은) 분명 우크라이나 농민에게 치명적인 선택을 강요했다. 곡물 비축분을 포기하고 굶어 죽거나, 곡물 비축분을 숨겼다가 체포되고 처형되거나.” 곡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은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소금, 등유, 성냥 같은 기본적인 공산품도 살 수 없었고 은행에서의 신용 거래도 차단됐으며, 트랙터도 수리할 수 없었다. 뒤이어 스탈린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 영토로 넘어가는 이들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 공화국 경계선을 폐쇄하는 봉쇄령까지 취했다.
“그해 가을 여러 지침, 즉 징발과 블랙리스트, 국경 통제, 우크라이나화 종식 등이 정보 차단 및 특별 수색과 결합되어, 현재는 홀로도모르라고 기억되는 기아로 귀결됐다. 그리고 홀로도모르는 예측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이 소련의 정치와 공적 생활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소련은 이후 홀로모도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각 지역에는 사망자 명부와 기록을 불태우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1937년 인구조사 결과가 볼셰비키 관료들의 추정치와 800만명이나 차이가 나자 통계 발표는 중단됐고 인구조사국 책임자는 체포돼 총살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인식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왜 푸틴을 믿지 못하는가. 답은 역사에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의 원작 소설이다. 오랜 세월 제지회사에서 근무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이 갑작스러운 해고를 당한 뒤, 재취업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해서는 안 될 일까지 감행하는 모습을 담았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동 현장의 언어가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 듯하다. 마침 책의 제목인 도끼를 뜻하는 ‘액스(ax)’는 정리해고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소설은 1997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현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1998년 처음 출간됐으며 이번 새로운 표지로 독자를 만난다. 박 감독은 책 추천사에서 “어떤 이론서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한 소설을 무릇 월급쟁이라면 다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며 “해고된다는 건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 아닌가요?”라고 썼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3일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연다.
이날 청문회에서는 차별금지법과 비동의강간죄 등에 대한 원 후보자의 입장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안과 관련해 정부와 민주당은 그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유보적 태도를 유지해 왔다.
원 후보자는 전날 국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에서 “일각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비동의강간죄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가해자의 폭행 및 협박’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이다. 후보자는 서면 답변에서 강간죄 개정에 동의하는 취지의 입장을 내놨다. 그는 개정을 두고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라며 “우려 의견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신상 논란으로는 위장전입 의혹이 거론된다. 원 후보자는 첫째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자택 인근 부모 소유 다가구주택으로 주소지를 옮겼다가 7개월 만에 다시 원래 주소로 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해당 사안에 대해 해명할 예정이다.
1972년 서울 출생인 원 후보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장을 지냈으며, 2023년 7월부터는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보좌진 갑질 의혹 등이 불거진 강선우 여가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자 지난달 13일 원 후보자를 후임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