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간녀변호사 3일(현지시간)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은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의 행사였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은 경제적 지원군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군사적 우군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행사 내내 존재감을 과시했다.
중국 측은 다자 외교 무대에 처음 데뷔한 김 위원장을 각별히 예우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오전 8시쯤 톈안먼 광장에 도착해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붉은 카펫을 따라 입장했다. 옅은 황금색 넥타이에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행사에 초청된 26개국 정상 중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보다 먼저, 뒤에서 두 번째로 입장했는데 순서와 위치에 민감한 중국의 관례를 고려하면 특별 대우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위원장은 시 주석 및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의 인사 자리에서도 두 손을 맞잡으며 친분을 과시했고 시 주석 역시 다른 정상들과 달리 두 손으로 화답했다. 기념 촬영 때도 김 위원장은 시 주석의 왼편에 선 펑 여사 옆에 섰다. 시 주석 오른편에는 푸틴 대통령이 자리했다.
톈안먼 광장 뒤편 돤먼을 통해 성루에 오를 때에도 푸틴 대통령, 시 주석, 김 위원장이 행렬의 선두에 섰다. 중국의 우호국인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카자흐스탄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 동남아시아 대표 친중 국가인 캄보디아의 훈 마네트 총리 등은 그 뒤를 따랐다.
오전 9시 개막한 열병식에서 시 주석은 톈안먼 성루 중앙에 앉았고 김 위원장은 그의 왼편, 푸틴 대통령은 오른편에 자리해 행사를 지켜봤다. 66년 만에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 장면’은 수십분간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열병식 도중 김 위원장이 시 주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대화하는 모습이 중국중앙(CC)TV 카메라에 포착됐다.
북·중·러 정상은 열병식이 끝난 오전 10시30분쯤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오찬 리셉션에 나란히 참석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오후 1시30분쯤 푸틴 대통령과 같은 차를 타고 국빈관 댜오위타이로 이동해 양자 회담을 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북한이 “쿠르스크 전투에 파병해 해방을 도왔다”고 언급하며 양국 관계의 우호성을 강조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북한군 파병에 대한 찬사에 감사한다”며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2019년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과 코로나19 대유행으로 6년 넘게 제약을 받아온 김 위원장의 외교 행보는 이번 열병식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러·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을 계기로 러시아와 군사 동맹에 가까운 밀착을 보였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전범 국가와 손잡고 유엔 제재를 받는 불량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번 열병식을 통해 경제적으로 90% 이상 의존해 온 중국, 군사적으로 밀착한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면서 새로운 외교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의 ‘은둔의 지도자’ 이미지를 사실상 벗어던진 셈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열병식이 시작되기 전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을 만나 북한으로 초청했다. 3시간가량 이어진 오찬 리셉션에서도 여러 국가 정상들과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외신들도 이번 열병식의 실질적 승자는 김 위원장이라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세 정상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함께 3대 강국인 듯한 환영을 연출했다”며 “이번 전승절 열병식의 승자는 김정은”이라고 평가했다.
전날 전용열차로 베이징역에 도착한 김 위원장은 당일 가장 먼저 주중 북한대사관을 찾았다. 이때 이용한 의전 차량 번호판은 ‘7·271953’이었는데, 이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인 1953년 7월27일을 연상시키는 숫자로 중국과의 반미 연대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사람을 셀 때는 ‘명’, 동물을 셀 때는 ‘마리’라고 쓰는 것이 우리말의 통례다. 언어습관이지만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위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동물권 운동가들은 이런 일상 언어에 내재한 종 차별적 요소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물론 여기서부터 논쟁은 뜨거워진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위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 즉 인간과 동물에 대한 차별적 언어습관은 처음부터 자연스럽다는 논리에 다수는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쟁의 본질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어떤 가치에 관한 대화이고, 생각의 지평을 확장하자는 제안이다.
동물권 입장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상정한다. 전통적으로 ‘마리’는 동물을 객체화해 세는 말이다. 실제로 ‘마리’라는 단어는 도축한 짐승의 ‘머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에 짐승의 머리는 두(頭)당 얼마로 거래되는 고깃덩어리였고, 결국 언젠가는 고기가 될 개체로서 헤아려졌다. 이런 유래를 알고 나면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자 또는 누군가의 가족이기도 한 동물에게 ‘마리’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명’이라는 글자를 사람의 ‘이름 명(名)’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두루 쓰이는 ‘목숨 명(命)’으로 해석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에 이미 균열이 일고 있다는 표징이다.
생태철학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출발하면 언어 역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 다른 존재들과 연대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동물을 ‘마리’로 세고, 동물의 신체를 주둥이(입), 모가지(목)처럼 낮춰 부르는 표현 등에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다. 생태철학자들은 이런 언어 쓰임이 인간의 다른 존재들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해왔다고 비판한다.
‘명’과 ‘마리’의 구분은 인간과 다른 생명을 완전하게 구분 짓는 경계선과 같다. 이를 녹여내어 포용적 언어로 전환하는 일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생태철학 관점에서는 동물을 향한 ‘명’과 같은 호칭이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생명 전체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데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언어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 자체가 생태철학의 가치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 배경과 가치 지향에도 동물을 ‘명’으로 호명하는 것에 대한 반발은 당연해 보인다. 보수주의적 관점을 넘어 실용적 어려움을 이유로 논쟁의 장에서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다. 결국 이 논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 윤리의 범위, 사회운동의 방법론이라는 세 층위가 겹쳐 있는 복합적 문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통의 목표에 대한 확신, 즉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인간과 다른 종이 보다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와 연대다.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의 수단이다. 그 수단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다. 언어는 사회 변혁의 가장 기초적인 기준점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