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온라인 [여자, 언니, 선배들] ④ “‘여자가 감히’를 넘어 ‘불모’가 되기까지”…문화재수리기술자 김도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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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121.♡.65.231) | 작성일 | 25-08-30 04:53 | ||
무공온라인 김도래 북촌불교미술보존연구소 대표(51)는 지난 19일 경기 화성시에 있는 연구소에서 경향신문 플랫과 만나 자신의 사명을 이와 같이 설명했다. 김도래 대표는 문화재 단청 수리기술자·보존과학 수리기술자·도금 수리기능자·칠공 수리기능자·전통도금 기능계승자 등 문화재 보존과 전승에 특화된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이날도 연구소에서는 보존 작업이 한창이었다. 불교 문화재뿐만 아니라 윤봉길 의사의 형틀과 같은 나라의 보물도 그의 연구소에서 새 삶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도래 대표는 불교미술계 명장 북촌 김익홍 선생과 개금장(개금: 불상에 금박을 새로 입히는 일) 백태남 선생의 딸이다. 그런 만큼 불교미술은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팔자처럼 다가왔다. 남동생에게 가업을 잇는 ‘사다리’ 역할이 싫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김 대표는 이제 더 많은 이들에게 문화재 보존의 가치를 전하는 다리가 됐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김 대표는 내 손으로 문화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이 아직도 든다고 했다. 또한 ‘어디 여자가 부처님에 손을 대느냐’란 인식이 만연하던 시절엔 절에서 쫓겨나거나 작업물을 도로 가져오는 일도 겪었다. 그 세월을 지나 이제는 한 때 쫓겨났던 절에서 당당하게 작업하고, 부처님을 되살리는 ‘불모’로 존중받는다. 김도래 대표는 많은 이들이 문화재 보존 일에 뛰어들기를 바란다. 분명 고생스럽지만 유물을 건강히 집으로 돌려보낼 때, 문화재 수리 능력을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유물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공부할 자신이 있고, 용기가 있는 진실한 마음”이 ‘문화재 의사’가 되기 위한 첫번째 자격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 어떤 계기로 단청과 문화재 복원 분야에 오게 됐나요? “저희 부모님은 가업을 잇기를 바라셨어요. 어릴 때는 그게 싫었어요. 부담스럽고, 힘들고, 저는 아주 ‘E’(외향형) 성향을 갖고 있는데 왠지 차분해야 할 것 같고…. 저랑은 안 맞는다고 생각했죠. 중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유화를 그렸더니 엄마가 붓을 다 부러뜨리고 못 그리게 했어요. ‘너는 불교미술을 해야 하니까 당장 불교미술이 아니더라도 동양화나 서예를 해야 한다’고요. 엄마가 엄격했고 무서워서 서예랑 동양화를 했어요. 19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있어요. 부모님은 동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했고, 저는 사다리 역할처럼 부모님에게 배워서 동생에게 다 줘야 한다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 때는 그 일이 너무너무 하기 싫어서 도망도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그냥 팔자인 것 같아요, 팔자.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가지지도 않고 계속 이쪽으로 맴돌게 되는 상황이 돼버려서 학교 공부 끝나고 (24살부터) 다시 불교미술을 했죠. 그때 동방미술대학에 엄마가 교수였어요. 한번 졸업해 보는 게 어떻겠냐 설득에 설득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래 한 번쯤은 해주지’ 이런 거였죠. 막상 발을 딛고 계속하려다 보니까 이게 내 일이고 운명이고 팔자인 것 같아요.” - 부모님은 왜 남동생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다른 남매들도 가업을 이었나요? “그냥 남자니까. 가업을 잇는 부분에서 남자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들을 어떻게든 낳아 물려줘야 한다 생각한 것 아닐까요. 엄마는 불교미술하는 집안을 만드시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여동생, 남동생 모두 다 이 일을 하기를 너무나 바랐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저는 동생들을 가르쳐보고 했죠. 그렇지만 될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여동생은 불교미술 작가다) 가업을 잇는 건 저뿐입니다.” - 가업을 잇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지금은 가업이라는 게 중요하진 않아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태어날 이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무엇을 할지 설명하는 것을 엄청 잘해요. 남동생한테 제가 부모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저는 인생이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엔 동생들에게 그랬고 지금은 많은 사람에게 강의도 하니까요. 또 저는 문화재 수리 기술자예요. ‘문화재 의사’잖아요. 말하지 못하는 유물들이 어디가 아픈지를 대변하고 설명하는 일을 해요. 소중한 전통을 지키고 미래에 남겨주는 것이 제가 태어난 이유 같습니다.” - 단청 작업은 어떻게 구성되나요? “기본적으로 혼자 할 수는 없어요. 건물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못해도 대여섯 명~수십 명까지도 작업을 해요. 단청의 문양은 가칠 단청 등 크게 4개로 나뉘고, 부처님을 모시느냐 보살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건물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설계해야 해요. 작업에 들어가면 화장하는 것과 비슷해요. 화장하기 전 얼굴 각질 제거를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단청도 ‘면닦기’를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는 것처럼 아교로 ‘포수’를 해요. 또 프라이머를 바르듯이 ‘바탕칠’을 하고 파운데이션으로 톤을 맞추는 것처럼 ‘가칠’을 하죠. 색조화장처럼 ‘초비’를 하고, 마지막에 아이라인을 그리듯이 ‘선 긋기’를 합니다. 화장이 날아가지 않게 픽서를 뿌리듯이 단청도 마찬가지고요.” -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 단청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극지방의 얼음, 유럽의 대리석처럼 각 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공이 쉬운 재료로 집을 짓는 거예요. 동양권에서는 그 재료가 나무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나무로 짓는 일본을 보면 우리만큼 단청이 발달하지 않았어요. 일본은 하드 우드(hard wood)인 활엽수를 주로 쓰기 때문에 굳이 색을 칠해서 보호해주지 않아도 균과 충이 들어가지 않아요. 반면 우리는 소나무로 짓는데, 소나무는 균과 충이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칠인 단청이 발달한 것이죠. 일본, 중국, 동남아에는 단청이란 용어가 없고 ‘건물 채색화’라고 합니다. 건축이 주인공이고 거기다 칠을 한다는 개념이죠. 우리는 단청이라는 고유명사가 있고 문양과 칠 기법도 가장 다양하고 섬세하게 발달했습니다. 가장 취약하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죠.” - 한국에서는 단청을 접하기 어렵지 않아 귀한 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감이 흔해 빠졌으니 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파란색 돌가루(물감) 주먹만큼이 1000만원이에요. 어마어마하게 비싸요. 그 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색토가 없었고 이란이나 중국에서 수입해 왔습니다. 나라에선 단청은 궁궐과 사찰에만 칠하라고 가사제한령을 내렸어요. 하지 말라니까 몰래 하고 그랬죠. 조선시대 어느 높은 사람이 첩의 집에 단청을 해줬다는 이유로 상소가 빗발친 일도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워낙 많이 보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숭례문 단청 재룟값만 8억원이 들었어요. 돈이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진짜 ‘플렉스’지요.” - 그동안 어느 곳의 단청을 작업했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해인사 용탑선원, 해인사 고불암, 진주 청곡사, 수원 봉령사, 서울 대각사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요.” - 문화재 수리 기술자와 기능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기술자는 전반적인 부분을 다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기술자가 스태프, 배경, 음악, 배우 등 전체를 다 보는 영화감독이라면 기능자는 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작업은 기능자가 대부분 하고, 기술자는 총감독하죠.” - 기능자에서 기술자가 되는 것인가요? “기술자를 하느냐 기능자를 하느냐는 성향 차이예요.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물론 기능자에서 기술자로, 기술자에서 기능자로 가는 예도 있는데요. 저는 타고나기를 기술자로 타고난 것 같아요. 전체를 봐야 편하더라고요. 문화재보호법에는 ‘기술자는 기능자를 관리·감독한다’고 해서 흔히 위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돈도 기능자가 더 많이 벌어요.” - 어떻게 일을 찾고 맡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나라의 일, 국보나 보물 같은 건 다 입찰로 나와요. 기술자·기능자 구성, 자본금 등 충족 조건을 갖춘 회사만 입찰할 수 있어요. 다음으로는 사찰이나 관공서 같은 곳과 수의계약을 맺기도 하고요. 요즘은 국보나 보물급 되는 일이면 어떻게 작업할 것인지 관계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해요. 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지원하기 때문에 그중 1등을 뽑는다는 것이 엄청 치열합니다. 몇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준비했는데 떨어지면 속상하죠.” - 연구소에서는 몇 명 정도가 일하고, 현재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요? “13명 정도가 일하고 8~9건을 작업 중입니다. 그중 하나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 가나자와에서 사형당할 때 매달렸던 형틀이 있어요. 일본이 윤봉길 의사를 욕보이려고 사람들 다니는 길에 그냥 묻었거든요. 김구 선생이 박열 선생에게 수습해오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십자가 형태 중 가로목은 없어졌는데 세로목은 남았습니다. 그 삼나무 형틀이 보물입니다. 셀룰로스 같은 나무 성분이 빠지지 않게끔 안정화·강화 처리를 하고, 그걸 넣을 함도 제작해야 해요.” - 문화재 복원은 책임감이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어떤 심정이나 각오로 임하시는지요? “처음에는 유물이 들어오면 나갈 때까지 잠을 못 잤어요. 미치는 줄 알았죠. 이거 잘못되면 어떡하지. 제가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이 유물은 없어져요. 그냥 죽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을 ‘감옥에 등을 대고 있는 사람’이라고들 말하거든요. 자칫 잘못하면 감옥 가요. 저는 ‘문화재 의사’입니다. 소장자가 유물을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옮기는 거죠. 사랑하는 가족을 맡기는 것과 같아요. 그때 제가 ‘어 저도 무서운데요’, ‘‘못 하겠는데요’ 이러면 소장자가 얼마나 불안하겠나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옛날에는 사실 떨리는 게 우선이었지만 겁나고 떨린다는 내 감정을 앞세울 순 없습니다. 유물이 누구의 것인지 아시나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의 것입니다. 물려주기 위해 저희 같은 사람이 있죠. 그래서 당당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 유물이 왜 아픈지를 알아내야 해요. 무서운 건 안으로 감춰놓고 ‘센 척’ 해야 하는 거죠.” - 작업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유물이 집에 갈 때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합니다. 죽은 유물을 살릴 순 없거든요. 할아버지를 청년으로 만들 순 없어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지금 이 상태로 건강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보존처리거든요. 그렇게 건강하게 나갈 땐 완전히 신나죠. 그리고 사실은, 유물이 오면 자문회의를 3번 거치는데요. 교수님, 공무원, 소장자 모두가 저를 쳐다봐요. 거기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해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면 눈빛이 달라져요. 처음의 시선과 다 끝낼 때의 시선이 달라지면 신납니다.” - 불교계가 보수적이어서 힘든 적도 있었다고요. “90년대 중반쯤 해인사에서 개금 공고가 떴어요. 저와 엄마가 절에 가서 출타하신 주지 스님을 일주일 동안 기다렸어요. 엄마 성함이 ‘백태남’이다 보니 스님은 남자인 줄 알았나 봐요. 그런데 사실 여자였다는 걸 스님이 알게 됐고, 저희가 일주일을 기다렸는데도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저희 엄마가 20대쯤 된 나이 어린 스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삭발할 테니 제발 개금을 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저까지도 삭발을 시키겠다고 하셨죠. 돈을 벌려고 그런 게 아니라 해인사 부처님을 개금하는 일이 큰 영광이잖아요. 끝끝내 못하게 하셨어요. 결국 저희 아빠와 남자 제자가 했죠. 단청 현장에서도 제가 두세 번 쫓겨난 적도 있고요. 불화 그림을 다 그려 갔는데 여자가 했다는 이유로 안 받고 다시 가져온 일이 되게 많았습니다. 전문가나 스님들이 ‘어디 여자가 설명하느냐’고 하던 것들도 참 무섭고 힘들었고요. 제자들이 또 나와 같은 고통을 받는 게 한편으론 마음이 아파요. 지금의 저는 명예롭고 행복하지만 이 행복이 올 때까지 고달픈 날이 너무 많았어요.” - 여자는 안 된다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그림 크기가 3~5m 정도로 크잖아요. 그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하거든요. 여자가 부처님 위에 올라탄다고 못 하게 했었어요. 개금도 불상이 크면 무릎 위에 올라가서 작업해야 하거든요. 지금은 많이 변해서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아직도 연세 많은 스님은 여자가 작업하는 걸 꺼리기도 합니다.” - 이렇게 여자가 환영받지만은 않는 일이라는 걸 어머님은 너무나도 잘 아셨을 텐데 딸에게 물려주려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계실 때는 아무도 제 앞길을 막는 이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일하고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모든 남자들이, 모든 스님들이 저한테 다 달라붙는 거예요. 자기 애인하자는 사람도 있고, 자기한테 잘 보여야 일 준다는 사람도 있고. 너무 치욕스럽고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때까지는 아빠가 울타리인지 몰랐어요. 저희 엄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 본인이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 일을 했으니까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도 같아요. 참 속상하지만 아직도 문화재는 이런 일이 많아요. 제 제자들은 여자가 많아요. 제가 공부할 때도 여자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 문화재 일하는 사람은 딱 둘밖에 없어요. 앞으로는 좋은 세상이 와야겠죠.” - 쫓겨났던 해인사에 다시 가서 일하실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제가 단청기술자로 마지막 작업을 한 게 해인사입니다. 지금까지도 칭찬을 많이 받아요. 그때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때 나 일 못 하게 했었지? 후회할 거야’ 이렇게요. 너무 신났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줬어요. 저처럼 일하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불모’라고 해요. 부처님을 태어나게 해주는 어머니라는 뜻이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불화를 그리면 보살님들이 저한테 와서 절하고, 개금을 하면 스님들이 저한테 와서 절해요. 어린 시절 쫓겨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는데 이제 이 나이가 돼서 불모 소리도 듣고 스님들한테 절 받아서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기쁜 마음만이 아니에요. ‘지금은 이렇게 하면서 옛날엔 왜 그랬는데’ 같은 마음이 같이 와요. ‘이걸 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미친 듯이 그림 그리고 공부하고 살았는데’란 생각이 들어요. 이제 와서.” - 공방과 연구소를 차린 이유와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북촌불교미술보존연구소에서는 문화재 복원 일을 하고 북촌 한옥에서는 교육과 체험을 하거든요. 제자들이 단청을 공부하려면 붓과 물감이 필요하잖아요. 불교미술 재료는 파는 데가 없어요. 제가 제자들을 쓰게 할 안료를 개발하고 붓과 도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사실 이 연구소는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노안이 왔고 체력도 많이 달리거든요. 이거를 오래 하는 건 욕심이에요. 언젠가 제가 제 손으로 보존처리 못 하고 유물 설명을 못 할 때는 과감히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교육은 가장 늦게까지 오랫동안 할 거예요. 저는 감사하게도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문화재를 배웠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많지 않아요. 그래서 재단을 만들어 마음 편히 오래 공부할 수 있게끔 해주고 싶습니다.” - 요즘 한국 전통문화와 문화재에 관한 관심이 높습니다. 체감하는지요? “불교 박람회 대박 났거든요. 젊은 친구들이 불교미술, 전통, 한복, 단청에 왜 열광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관심을 실감하고 있어요. 저희 설명회에도 백 명 가까이 와요. 불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강요할 수 없는 종교라는 면이 있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기댈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으니 스스로 깨닫고 힘든 것을 힐링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저희한테 오신 분들은 집중, 힐링, 몰두, 성취감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픈 문화재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힐링하는 것도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수되는 분야에 여성이 진출하고 자리 잡기가 특히 힘든 것 같습니다. 후배에게 어떤 선배가 되고 싶으신가요? “젊을 때부터 김도래라는 제 이름 앞에 ‘희망’, ‘멘토’, ‘모델’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없어도 있는 척하면서 살았고요. 어떤 부분에서는 행복한 척, 있어 보이는 척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렇진 않아요. 제자나 후배들이 저를 봤을 때 ‘행복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불교미술하는 사람, 문화재 복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거든요. 옛날에는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면 사람이 많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내가 행복해 보이면 그런 사람이 많아질 수 있거든요.” - 문화재 수리 기술자의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요?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웬만한 사람보다 많이 법니다. 왜 그런 구조냐면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라 문화재가 많아요. 그런데 주변에 문화재 수리 기술자 본 적 있으세요? 환자는 많은데 의사는 없어요. 그러니까 환자는 줄을 서고 의사가 돈을 많이 벌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는 일에 비해 많은지를 본다면 적은 것 같아요. 우리끼리는 우스개로 ‘자식 죽으면 또 낳으면 되지만 문화재는 안 된다’고까지 해요. 그럴 정도로 희소성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처럼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긴 하거든요. 그러려면 처우가 좋아져야 하고 이 분야에 관심 가진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 이 분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돈 좀 번다며?’ 이런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당장 내쫓아요. 십 년 동안은 죽을 둥 살 둥 해야 하는 고생스러운 일이에요. 그 힘듦을 버틴 다음 단맛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남의 목숨(유물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공부할 자신이 있고, 용기가 있다면 시작해도 돼요. 진실한 마음만 가지고 오면 다 할 수 있어요. 그림과 문화재를 가르치는 건 선생인 저의 몫입니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 이번 [여자,언니,선배들] 어떠셨나요? 입주자님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 )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64)는 여성 최초로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PME) 회장에 선출됐다. 아시아 출신으로는 두번째다. PME는 수학교육 분야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학회다. 직접 들어 본 그의 커리어에는 ‘최초’가 ‘최후’로 그쳐선 안 된다는 사명감이 녹아 있었다. 서울대 수학교육과 최초 여성 교수 등의 여러 수식을 가진 연구자로서 또 다른 분야의 ‘첫번째’들을 위해 여성과총에... 시즌 6로 돌아온 플랫레터!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밀려드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쉽게 흘려보내기 쉬웠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매월 둘째 주 화요일에는 여성(F)의 관점으로 금기에 반기를 드는 칼럼 [에프워드]를 넷째 주 화요일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이정표이자 버팀목이 된 여자 선배들의 인터뷰 [여자, 선배, 언니들]을 보내드려요. 이재명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방미 마지막 일정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72년 역사의 한·미 동맹은 필리조선소를 통해 안보·경제·기술 동맹이 합쳐진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의 새 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5박6일의 해외 순방을 마치고 28일 새벽 귀국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동해 필리조선소 현장에서 진행된 선박 명명식에 참석했다. 선박 이름은 ‘스테이트 오브 메인(State of Maine)호’로 미 해양청이 발주한 국가안보 다목적선이다. 명명식은 선박을 건조한 뒤 이름을 지으며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행사다. 필리조선소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로 주목받는 한·미 조선업 협력의 상징적인 곳이다. 이 대통령은 전날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조선업 협력 강화에 뜻을 모은 뒤 이날 필리조선소를 찾았다. 이 대통령은 축사에서 “대한민국의 조선업이 이제 미국의 해양 안보를 강화하고, 미국 조선업 부활에 기여하는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서게 된다”며 “동맹국의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제가 트럼프 대통령께 제안한 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는 단지 거대한 군함과 최첨단 선박을 건조하겠다는 비전만이 아니다”라며 “사라진 꿈을 회복하겠다는 거대한 비전”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한국의 조선소들은 미국 조선소에 투자하고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현대화된 공정 기술이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과 대한민국 조선업이 더불어 도약하는 ‘윈윈’의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고, 오늘의 새로운 출항은 한·미 양국이 단단한 우정으로 써내려가는 또 하나의 희망과 도전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는 쇠락했지만 필라델피아는 19세기 이후 오랫동안 미국 조선업의 중심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에서 군함 50여척이 건조됐고, 수리한 군함은 500여척에 이른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역사를 언급하면서 “필라델피아의 앞바다를 가르며 나아간 함정들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통받던 대한민국 국민을 구해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조선 협력의 주역은 여기 계신 기업인과 근로자 여러분”이라며 “한화오션이 필리조선소에 투자한 이후 수많은 미국 견습생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조선 강국의 꿈이 필라델피아 청년들 속에 다시 자라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필리조선소는 최첨단 선박 기술을 보여주는 미국 최고의 조선소로 거듭날 것이고, 미국 해안 벨트 곳곳에서 조선업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기업인과 근로자들이 허허벌판에 K조선의 기적을 일궈냈듯, 한·미가 힘을 모아 마스가의 기적을 현실로 빚어내자”고 격려했다. 이 대통령의 필리조선소 방문에는 조현 외교부 장관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 데이비드 김 필리조선소 대표 등이 동행했다. 미국 측에서는 조시 셔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토드 영 상원의원, 이상현 미 해양청장 대리 등이 참석했다. 앞서 한화그룹은 지난해 12월 필리조선소를 1억달러(약 1390억원)에 인수하며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조선업에 진출했다. 필리조선소의 모태는 1801년 미 해군조선소다. 1997년부터 민영으로 운영돼왔다. 한화그룹이 인수한 이후 미국 해양청으로부터 국가안보 다목적선 5척의 건조를 의뢰받았다. 3억달러(약 4180억원) 규모다. 이날 명명식을 치른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는 그중 세 번째 선박이다. 이 선박은 비상시 재난 대응 및 구조 임무를 수행하며 평시에는 훈련용으로 활용된다. 현장 시찰에서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 대통령에게 “필리조선소에 추가로 투자해 확장이 완료되면 생산 능력이 현재 연 1.5척에서 20척 이상으로 늘어나고, 직원 수도 약 7000명 규모로 확대된다”며 “주변 공급망 확대와 간접고용 인원까지 포함하면 고용 효과는 1만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동석한 미 정부 인사들에게 한국 기업의 투자가 원활히 진행되고 미국 내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제도적 지원을 다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조선 협력의 상징인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한·미 동맹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길 기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방명록에 서명했다. “시인은 모름지기 장례식 관값이나 남기면 돼. 각혈하고 죽어야 진짜지.” 가난한 지리산 시인 형의 농반 진반. 진짜 그리 살다 죽은 시인도 있다.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이시카와 다쿠보쿠. 이름에 ‘석(石)’자가 붙어 있는데, 시인 백석이 하도 그를 흠모해 ‘석’자를 빌려 썼다는 말도 있다. 다쿠보쿠는 신문기자로 목에 풀칠하며 지냈는데,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침략전쟁을 반대해 우익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온 가족이 폐결핵으로 죽고 자신도 26세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내의 고향인 북해도 하코다테에 유골을 이장했지. 다쿠보쿠가 쓴 <삿포로>란 미완성 소설이 있다. 소설은 시골에 낙향한 기자 이야기. 자기 경험담을 싱겁고 밍밍하게 썼는데, 1908년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북해도 풍경이 펼쳐진다. 심심한 소설도 좋고, 심심한 설교도 괜찮아. 어떤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교인이 다가와 한마디. “불면증으로 요새 고생이 참 많았는데 목사님 덕분에 씻은 듯 나았네요.” “앗, 그래요? 제 설교가 그렇게도 은혜가 되었습니까?” “설교가 졸려서 아주 푹 단잠을 잤어요. 다음주 설교도 기대하고 오겠습니다.” 잠시 초가을 냄새가 향긋한 북해도에 건너왔다. 밀리고 쓸리는 심심한 파도 구경. 숙소에서 읽으려고 통도사 ‘군자’ 경봉 스님의 일대기 책을 들고 왔는데, “밥 먹었나?” “안 먹었습니다.” “공양간에 가서 밥부터 먹어라.” 먹는 밥만이 아니라 진리의 밥도 같이 물은 거란다. “밥 먹었나?” “어떻게 하면 깨달음의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냥 밥만 잘 먹으면 돼. 주리면 먹고 졸리면 자야지. 그런데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잠잘 때는 잠만 자거라.” 죽을 때 되면 “네네~” 하고 잘 죽으면 되겠지. 우린 시방 머릿속이 뭐가 너무 복잡해. 강원 고성군은 65세 이상 주민의 교통복지와 이동권 보장을 위해 ‘어르신 교통복지 지원 조례’ 제정을 추진한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조례는 교통비 부담을 줄이고, 대중교통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례안에는 고성군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는 65세 주민을 위한 ‘시내 버스 무료 이용 지원’과 ‘교통카드 발급 신청’ 등 교통편의 제공을 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고성군은 고성군의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이번 조례를 공포한 후 오는 2026년 1월 1일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올해 하반기 중 ‘통합복지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함명준 고성군수는 “이번 조례는 65세 이상 주민들의 교통비 절감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이 같은 조례 제정을 추진하게 됐다”라며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전국 18개 시·도경찰청에 ‘산업재해수사팀’을 새로 꾸린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에게 “산업재해 사건에 대한 전문적 수사가 필요하다면 전담팀 구성을 검토하라”고 말했다. 경찰청은 오는 9월1일 국가경찰위원회에 산업재해수사팀 신설 및 정원 조정안을 상정해 심의·의결을 요청하기로 했다. 신설팀은 총 101명 규모로, 기존 시·도경찰청 형사기동대 소속 안전사고수사팀 59명을 흡수하고 여기에 42명을 추가 투입한다. 보강되는 인력에는 고용노동부에서 파견되는 ‘산업재해수사협력관’ 7명도 포함됐다. 경찰은 협력관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산업재해 사건의 규정 해석과 수사 지원을 받겠다는 계획이다. 또 경기남부경찰청에는 전국 단위로 활동할 ‘산업재해 전담 과학수사팀’을 신설해 중대재해 현장 감식 전문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경찰이 산재 전담 수사조직을 만들기로 하면서 고용노동부와의 역할 중복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중대산업재해는 고용노동부가 맡고 중대시민재해와 업무상 과실치사상은 경찰이 담당한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직협)는 지난 19일 입장문을 내고 “고용노동부의 고유 소관인 산재 업무로 경찰이 영역을 넓히면 불필요한 권한 중첩과 혼선을 야기한다”며 “경찰의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분산시켜 본연의 치안 활동을 위축시키고 전체적인 비효율성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29일 “혐의별 담당 기관은 이미 법으로 구분돼 있어 수사 충돌은 없을 것”이라며 “기존 안전사고수사팀이 하던 업무를 전담조직이 맡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 직협이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선 “증원이 안 된다고 잘못 이해한 것 같다”며 “내부적으로 증원 방안이 검토·논의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리기 전 글을 쓰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앞으로 고용노동부와의 협력 체계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같은 사업장에서 상해·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고용노동부와 경찰이 각기 다른 혐의로 수사하는 만큼, 두 기관이 손발을 맞춰야 효과가 커질 수 있다는 취지다. 이혼전문변호사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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