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여름, 송흠선이 전주 들판에서 참수됐고 그 목은 저자에 걸렸다. 굳이 송시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대부에게는 과한 처벌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송시열 위패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였다. 집권 세력인 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송시열 성인화에 매진해도 못마땅할 후손이 위패까지 훼손했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던 듯했다. 이듬해인 1809년 음력 4월1일, 조정에서는 다시 송시열의 후손 송능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송능상은 송시열의 증손자로, 지역에서 학덕을 인정받아 ‘유일’(遺逸·관직에 나가지 않는 은거한 선비)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지 50년도 더 되었지만, 윤우대를 비롯한 사부학당 유생들은 선현을 깎아내리고 모욕했다는 이유로 송능상을 탄핵했다. 그의 문집 <운평집>에 주자 정론과 다른 입장이 들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禮)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 듯했다.유학에서 ...
도시 속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백사실계곡. 지난겨울 눈이 많이 내렸던 날 찾고는 몇 달 만에 다시 찾았다. 그 사이 계절이 변했다. 지천으로 폈던 꽃이 떨어져 오솔길에 융단처럼 깔렸다. 꽃이 지니 나무마다 새잎이 돋아나 신록이 싱그러웠다. 연두색을 벗어나지 못한 어린잎이 바람에 날려 춤을 추는 듯했다. 숲길을 걷는 사람들 표정이 모두 밝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게 자란 나무들이 녹색 지붕을 만들어 놓은 듯 푸르렀다. 이양하의 수필 ‘신록예찬’이 저절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 5월이 신록과 함께 찾아왔다.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
책이 빛난다. 하지만 종이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책들은 진열장에 우두커니 놓여있지만은 않았다. 책은 말하듯 스스로에게 새겨진 이야기를 빛과 영상으로 풀어놓는다.서울 종로구 수림큐브에서 지난달 17일부터 열리고 있는 ‘사유하는 책, 빛의 서재 : 강애란 1985-2025’에서 나타나는 광경들이다. 유아트랩서울이 주최·주관하고 수림문화재단이 협력한 이번 전시는 작가 강애란(65)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를 총망라한 회고전 성격을 띤다.초창기에 만든 석판화와 보따리 모양 조각을 빼면 전시를 아우르는 대상은 ‘책’이다. 사실 보따리도 책가방이 생기기 이전엔 등하굣길 책을 담아두는 도구였다. 금속 등으로 주조된 보따리 모양 조각들은 책을 싼 뒤 매듭을 지은 보따리를 닮았다. 지난달 29일 전시장에서 만난 강애란은 “보따리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생각주머니’”라며 “생각을 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책이 있어야 한다. 보따리가 책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