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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7) 왕의
작성자  (175.♡.35.81)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7) 왕의 인성과 사생활 - 정종(上)태조 차남·신의왕후 한씨 소생고려서 벼슬 불구 정치 뜻없어왕위 오른뒤에도 정사엔 무심정처 정안왕후가 아이 못낳아결혼 15년만에 후처 유씨 들여유씨와 낳은 ‘불노’ 세자 책봉이방원 반발에 “내아들 아니다”결국 궁밖으로 쫓겨나 승려 돼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여성 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허수아비 왕정종(定宗)은 태조의 차남이며,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방과(芳果)였다가 후에 경()으로 바꿨으며, 자는 광원(光遠)이다.그는 고려조에 벼슬은 했으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개국 이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조정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이방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또한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정사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격구나 즐기고 사냥이나 다니면서 용상에서 내려올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만 왕위에서 내려오라는 눈치를 주자 아무 미련 없이 아우 태종에게 용상을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났다.이런 그의 행동들을 볼 때, 그는 성격이 너그럽고 집착이나 욕심이 많지 않은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들어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는 현명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조선 2대 왕 정종을 평가할 때, ‘허수아비 왕’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사실, 왕으로서는 동생 이방원의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이 사실이고, 정치 역량에 있어서도 방원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하지만 동생 이방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여성 편력이었다.정종 이방과가 왕위에 머문 것은 2년 2개월에 불과했다. 거기다 그 시기의 정사는 대부분 이방원의 뜻대로 처리됐다.이렇듯 재위 기간은 몹시 짧고 남긴 업적도 없지만, 후궁은 무려 열 명이 넘는다. 그들 여인들에게서 얻은 자식의 수가 25남매였으니, 자식 수로 따지면 조선 왕들 중에서는 28남매를 둔 성종에 이어 당당히 랭킹 2위다. 하지만 그 여성 편력의 배경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뒤늦게 얻은 두 번째 부인과 짧은 로맨스그는 열 명의 여인들을 통해 25남매를 얻었지만 적자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처 정안왕후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이방과와 김씨의 금슬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김씨가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도 방과는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7) 왕의 인성과 사생활 - 정종(上)태조 차남·신의왕후 한씨 소생고려서 벼슬 불구 정치 뜻없어왕위 오른뒤에도 정사엔 무심정처 정안왕후가 아이 못낳아결혼 15년만에 후처 유씨 들여유씨와 낳은 ‘불노’ 세자 책봉이방원 반발에 “내아들 아니다”결국 궁밖으로 쫓겨나 승려 돼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여성 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허수아비 왕정종(定宗)은 태조의 차남이며,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1357년(공민왕 6년) 7월 1일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방과(芳果)였다가 후에 경()으로 바꿨으며, 자는 광원(光遠)이다.그는 고려조에 벼슬은 했으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개국 이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조정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에도 전혀 왕위를 넘보지 않았고, 세자의 자리는 당연히 이방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또한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정사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격구나 즐기고 사냥이나 다니면서 용상에서 내려올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만 왕위에서 내려오라는 눈치를 주자 아무 미련 없이 아우 태종에게 용상을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났다.이런 그의 행동들을 볼 때, 그는 성격이 너그럽고 집착이나 욕심이 많지 않은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들어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는 현명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조선 2대 왕 정종을 평가할 때, ‘허수아비 왕’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사실, 왕으로서는 동생 이방원의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이 사실이고, 정치 역량에 있어서도 방원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하지만 동생 이방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여성 편력이었다.정종 이방과가 왕위에 머문 것은 2년 2개월에 불과했다. 거기다 그 시기의 정사는 대부분 이방원의 뜻대로 처리됐다.이렇듯 재위 기간은 몹시 짧고 남긴 업적도 없지만, 후궁은 무려 열 명이 넘는다. 그들 여인들에게서 얻은 자식의 수가 25남매였으니, 자식 수로 따지면 조선 왕들 중에서는 28남매를 둔 성종에 이어 당당히 랭킹 2위다. 하지만 그 여성 편력의 배경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뒤늦게 얻은 두 번째 부인과 짧은 로맨스그는 열 명의 여인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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