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이혼전문변호사 중국 정부가 최근 홍콩에 부임한 미국 총영사에게 반중 세력과의 접촉 금지 등 ‘레드라인’을 제시한 가운데 미 국무부가 이를 일축했다. 다음 달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미·중 사이에 홍콩 문제를 둘러싼 신경전이 나타나고 있다.
미 국무부 고위당국자는 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보낸 성명에서 중국 외교부가 줄리 이더 신임 주홍콩·마카오 총영사에게 홍콩 내 활동과 관련 경고한 것에 대해 “미국 외교관들은 미국을 대표해 전 세계에서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임무가 있다. 이는 홍콩을 포함해 세계 전역에서 외교관들의 표준 관행”이라고 밝혔다.
국무부의 이 같은 입장은 앞서 중국 외교부 주홍콩 특파원공서 추이젠춘(崔建春) 특파원이 이더 총영사와의 면담에서 ‘홍콩 내정 불간섭’을 요구한 것을 사실상 일축한 것으로 풀이된다. 추이젠춘은 이더 총영사에게 ‘네 가지 레드라인’을 제시하며 “총영사가 만나서는 안 되는 이들과 만나지 말 것, 반중 세력과 결탁하지 말 것, 홍콩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어떤 활동을 조장·지원하지 말 것, 홍콩 국가안보 사건에 개입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중국 외교부 주홍콩 특파원공서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더 총영사가 홍콩 내 민주화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왔다. 특히 지난 8월 부임한 이더 총영사 환영 리셉션에 에밀리 라우 전 홍콩 민주당 주석과 안슨 찬 전 홍콩 정무상 사장이 참석한 것을 공개 비판해 왔다. 중국은 이더 총영사가 트럼프 1기인 2019년 주홍콩 총영사관 정무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홍콩 민주화 운동가 조슈아 웡과 네이선 로 등을 만난 것도 비판해 왔다.
중국은 2020년 홍콩 보안법 시행 이후 외국의 홍콩 문제 개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존 리 홍콩 총독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홍콩에서 활동하는 외교관들이 중국의 주권과 법률을 존중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홍콩 당국과 중국 정부는 또한 홍콩 내 민주화·자치 보장 목소리를 갈수록 억압하고 있다.
홍콩을 둘러싼 미·중 기 싸움이 다음 달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기간 열릴 예정인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펼쳐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이다. 종종거리며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이 어둡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느긋하고 한적한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저마다 자기를 몰아댄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이 된 시대다. 가속화하는 시간에 떠밀리며 살기에 늘 숨이 가쁘다. 회복 탄력성이 줄어들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다. 몸이 발하는 멈춤 신호 앞에서도 멈추지 못해 탈이 나곤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이들은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멈추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 거라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멈추지 못함의 부산물은 조급증이다.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이끌어낸 신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했다. 자기 통제권을 잃고 타자의 지시에 따라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주어진 이 명령은 몸과 마음에 깃든 타율성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깊은 바다에 머물던 잠수부들이 감압 장치에 들어가 체내에 녹아 있던 질소를 안전하게 배출하는 것처럼, 사람은 멈춤을 통해 자기를 회복한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사람들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이렛날을 성별함으로 역사를 넘어선다”고 말했다. 하던 일을 멈출 때 숨은 가지런해지고 밖으로 향했던 시선은 내면을 향한다. 분주함 속에서 잊고 살던 존재에 대한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뿌리와 지향을 바로 알 때 삶은 단순하고 가지런해진다.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올해도 장사진을 이루던 귀성 행렬을 볼 수 있을까? 고향은 그곳에 있음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세상에서 부유하는 이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울타리다. 하이데거는 고향 상실을 인간 실존의 근본적 정황으로 제시한 바 있다.
김준태 시인의 ‘강강술래’는 귀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추석날 천릿길 고향에 내려가/ 너무 늙어 앞도 잘 보지 못하는/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드린다/ 어느덧 산국화 냄새 나는 팔순 할머니/ 팔십 평생 행여 풀여치 하나 밟을세라/ 안절부절 허리 굽혀 살아오신 할머니/ …” 정경이 저절로 그려진다. 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드리는 손자와 그에게 직수굿하게 몸을 맡긴 채 흐뭇한 시간을 누리는 할머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 따뜻한 접촉은 치유이고 사랑이 아닌가? 조락의 조짐이 보이지만 조심스레 걸어온 세월의 향기가 배어든 할머니의 시간을 시인은 ‘산국화 냄새’로 형상화하고 있다. 할머니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면서 시인은 오히려 자기 마음을 치유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을 가리키지만 마음 둘 곳 또한 고향이 아닐까? 그 사람만 생각하면 적이 안심이 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았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다. 로렌초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다. 자연스럽게 선행을 실천하는 그를 보며 레비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마음 둘 곳, 곧 고향이 된 사람이 아닐까?
어지러운 세태 가운데서 마음 둘 곳을 잃어 바장이는 이들이 많다. 우리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고향이 될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