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원서서점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나 사람이 가난한 모양을 뜻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에서 왔다고들 한다. 푸른 뱀의 해, 그러니까 2025년이 바로 을사년이다.설은 여러 가지다. 누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자리잡았다 하고, 다른 누군 1785년 을사년 대기근 이후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뭐가 됐든, 푸른 뱀의 해에 나라가 망하거나 수많은 이들이 배곯아 스러졌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 스며 있는 셈이다.그리고 참 을씨년스러운 세밑을 지나왔다. 내란죄 피의자인 대통령의 측근은 체포영장 발부가 법치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혹세무민하고, 무안공항에선 가족을 잃은 이들의 절규가 하늘과 땅을 울렸으며, 정당한 고용승계를 요구하면서 385일째 공장 옥상에서 생활하는 한국옵티컬하이테크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뼈에 사무친다.아직 을사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아닌데, 이미 이...
출근길에는 유튜브에서 ‘엄마 내 오둥이 어디 갔어요? 클래식’이라는 제목의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 섬네일은 길바닥에 버려진 오리 인형. 이마에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인 채 어딘가 어리둥절한 표정. (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캐릭터를 오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댓글 창에서는 사람들이 가져 본 적도 없는 오둥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오둥이를 잃어 본 적 없으면서. 없는 기억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없는 오둥이를 잃어서 슬프다. 그것이 나에게 당신들에게 진짜 있었던 일이 아니라서 마음껏 슬프다. 그래서 여기에다 슬프다고 마음껏 쓴다.진짜 있었던 그 일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슬프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어렵다. 그래도 지난여름 내 얼굴을 보려고 매일매일 노력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양치를 하며 거울을 보는 일. 퇴근하고 돌아와서 내가 누군가의 삶을 망치지 않았는지 일기에 적는 일. 그건 아주 힘든 일이었지만, 바로 그 일들을 해내느...
2024년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수상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작가들이 국제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만들어온 흐름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그동안 저평가됐던 한국 문학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디지털 시대에 다소 밀려났던 문학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 작가 외에도, 올해 한국 문학의 존재감을 한층 더 빛낸 소설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와 온라인 서점 PD의 추천 등을 바탕으로 눈에 띄는 몇 권의 작품들을 살펴봤다.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은 교보문고가 조사한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서 공동 3위에 오른 작품이다. 2021년 데뷔 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예 작가는 한국문학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했다. <사랑과 결함>은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2023년 문지문학상 수상작 ‘사랑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