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성추행변호사 넷플릭스, 티빙 등 국내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약관이 지난 5년간 정부 심사를 한 차례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 법에 따라 이용자 약관의 심사·조사 권한을 가진 정부가 이를 방치했기 때문이다.
9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용만 의원실에 따르면, OTT 약관에 관한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는 2020년 12월을 끝으로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공정위는 6개 사업자(넷플릭스·웨이브·티빙·시즌·왓챠·구글)를 대상으로 한 직권조사를 통해 ‘중도해지 시 환불 불가’ ‘사전 고지·이용자 동의 없는 요금 인상 조항’ 등 6개 불공정 약관의 시정을 요구했다.
공정위는 그러면서 “온라인 플랫폼 분야 불공정 약관 감시를 강화하고 표준약관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2021년 이후 약관 심사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공정위에 다양한 업종의 약관을 심사·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으나 의무는 아니다.
공정위가 손 놓고 있는 사이 OTT 관련 소비자 피해는 급증했다. 한국소비자원 1372 콜센터 집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20년~2025년 9월) 국내 7개 OTT 서비스 관련 민원은 총 2811건으로 이 중 넷플릭스(1423건)가 절반가량 차지했다. 연도별로 보면 2020년 538건에서 올해 9월 808건으로 늘었으며, 민원 사유는 계약 해제·해지 및 위약금이 1098건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넷플릭스의 경우 2020년 조사 이후 수정된 약관을 제출했으나, 이듬해 요금 인상을 단행하면서 ‘요금 인상 동의’나 ‘다른 멤버십 보기’ 버튼만을 제공, 동의하지 않은 이용자의 콘텐츠 시청 자체를 제한했다. 정부가 불공정 조항 수정 여부만 확인한 뒤 실제 취지대로 이행했는지는 살피지 않는 사이 꼼수를 부린 것이다.
넷플릭스는 2023년에도 광고 없이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월 9500원짜리 베이식 요금제의 판매를 중단해 신규 가입을 막으면서 사실상 요금을 인상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의원은 “OTT 사업자들이 요금 인상과 해지 방해로 국내 이용자를 기만하는 동안 공정위는 사실상 방관자 역할을 했다”며 “이제라도 형식적 검토가 아닌 실질적인 감독과 제재로 소비자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에서 교착상태라는 게 있다. 양군의 전력이 엇비슷해 조금의 진전도, 변동도 없는 상황을 뜻한다. 1차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였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초기 돌격이 저지된 후 양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교착상태에 빠졌다.
정치에도 그런 교착상태가 있다. 즉 세력 A와 세력 B가 투쟁할 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 채 둘 다 탈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세력은 도돌이표처럼 각자의 주장만 무한 반복하며 출구나 타협책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에 국민들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 삶을 돌보지 않는 정치에 염증과 무관심을 내보이며 불만과 좌절감을 쌓아나간다.
역사에서 교착상태는 기성 헤게모니가 붕괴한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강제적 지배가 아닌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지도력이고, 이 지도력은 자신의 생각을 ‘상식’으로 제시해 자연스럽게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 헤게모니 역량이 소진되면 위기가 온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의 말을 인용해 헤게모니 위기를 이렇게 요약한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런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
그런데 헤게모니 위기에서 경합하는 두 세력의 투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홀연히 제3의 세력이 등장해 판을 뒤엎고 상황을 평정한다. 이것이 보나파르트주의다. 이 명칭은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에서 유래했다. 정치적 낭인이던 그는 1848년 혁명의 기회를 움켜쥐고 나폴레옹의 후광을 이용해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당시 프랑스의 부르주아 지배층은 지배력을 행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신비한 망토를 걸친 개인으로 대표되는 국가에 자신들의 권력을 양도한 것이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투쟁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군대와 관료제를 통한 권위주의적 개인 독재를 수립했다.
파시즘도 보나파르트주의의 변종이다. 1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지배층이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거센 도전에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솔리니라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로마 진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새로운 파시즘의 이념과 체제는 고대 로마 독재관 이름을 따 카이사르주의라고도 불리는데 보나파르트주의와 거의 같은 말이다. 둘 다 낡은 것은 죽고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헤게모니 위기의 결과이며, 새로운 헤게모니를 생성하려는 과도기적 권력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도, 무솔리니도 안정된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실패했다. 물론 두 보나파르트주의 체제가 20년 남짓 유지됐으니 내구성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두 체제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심각한 퇴보가 있었고 두 체제의 붕괴와 함께 참혹한 내전이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두 체제를 선택한 대가는 오롯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민들이 치러야 했다.
최근 우리도 보나파르트주의 같은 것이 출몰할 만한 상황을 겪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교착상태에서 보나파르트주의의 시도도 저지된 것이다. 실패한 계엄이 그것이다. 이는 그럴 만한 보나파르트적 지도자도 없었거니와, 민주주의적 견제력이 훌륭하게 작동한 결과였다. 이제 민주주의는 애초에 보나파르트주의를 배양했던 교착상태를 돌파할 추진력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과 동지에 대한 평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과 동지 사이에는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있고 반대 세력이 모두 적대 세력은 아니다. 또한 개혁이 당장의 필요가 아니라 역사적 요구이며 소수의 이해가 아니라 다수의 공공선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헤게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