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폰테크 천하 사물은 그 모양대로의 웅덩이다. 풍경의 요소들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고유한 구멍이었다. 햇빛이 그 웅덩이를 차곡차곡 채워야 사물은 그 사물로 드러난다. 나무 한 그루에는 그 부피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빠르고 일정한 속도의 빛은 이 웅덩이를 동시에 가득 채운 뒤 다음 국면으로 나아간다. 자연이 명확한 둘레로 빈틈없이 구성되는 건 그 덕분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이런 사실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제는 옛날의 일, 겨울 한밤중 취객이 된 적이 있었다. 벗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할 때, 하루의 고요를 다독이며 가로수와 가로등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럴 때 고개 숙인 가로등을 만지면 공기보다 더 찬 냉기가 손바닥을 찌르고 기둥을 두드리면 텅텅 빈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가로수는 다르다. 그 싸늘한 추위에도 한낮의 햇빛을 저장했다가 취약한 시간에 미량의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때 그 촉감이 고맙고 좋아서 가로수를 만지듯 산에 가면 훤칠한 나무한테 반해 저절로 밑동을 쓰다듬기도 했다. 내부를 볼 수 없지만 껍질에서 확고하게 전해지는 나무들의 꽉 찬 느낌. 나무 단면의 나이테를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단 하나의 빈틈도 허용치 않고 차곡차곡 공중으로 자라난 나무들.
분류학은 차이를 통해서 자연계에서 생물의 위치를 정하는 학문이다. 종(種)-속(屬)-과(科)-목(目)-강(綱)-문(門)-계(界)의 체계를 따른다. 이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심오한 자연 질서를 대하는 인간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해서 번식이 가능한 무리인 종을 시작으로 점점 비슷한 분류군으로 전개된다. 밤늦게 어느 가련한 취객에게 호의를 베푼 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한다.
영과후진(盈科後進)은 맹자에게 배우는 빛나는 한 대목이다. 통상 과(科)는 과목이나 과정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웅덩이를 뜻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모두 채운 뒤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기초부터 착실히 다져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의 비밀 하나를 저기 풍경에서 알아채고 등산하는 길, 맹자가 가르쳐주는 세상의 원리 하나를 나무들 앞에서 새긴다.
지난 9월 경기 양평과 전남 담양에서 올해 한국친환경농업인대회와 전국생물다양성대회가 열렸다. 친환경농업을 사수하고 있는 농민들이 서로 격려하는 큰 대회다.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이 출동했고, 친환경 농민들의 노고를 추켜세우면서 친환경농업이 지구와 국가의 미래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다짐을 자료집에 빽빽하게 적어놓았다. 친환경농업인대회에는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참석해 대통령의 축하를 전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로 친환경농업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장관 축사를 통해 표명했다.
생물다양성 문제는 친환경농업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오는 최종 생산물이 친환경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밭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생물다양성을 측정할 때 조류, 양서류, 포유류, 식물, 수서생물까지 포함하며 그 범위는 촘촘하고도 넓다. 친환경 논의 거머리나 물벼룩도 지구 생태계에서는 기특한 생물종이지만, 농민들에게는 번거롭고 농업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존재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사짓는 일도 고되건만 여기에 생물다양성까지 각별히 챙기라는 것도 염치없다. 그러려면 친환경 농산물에 생물다양성을 지킨 노력 값을 쳐주어야 한다.
2019년부터 영농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을 줄이고 환경보전을 실천해보겠다는 마을을 대상으로 5년간 지원하는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이 실시됐다. 심사를 거쳐 65개 마을이 선정돼 관련 활동을 이어왔다. 제초제 없이 잡초를 제거하거나 녹비작물을 재배해 화학비료 사용을 줄이고, 하천 정화 활동을 통해 경관과 수질을 개선하는 등 생물종의 서식 여건을 낫게 만들려는 노력을 해왔다.
우수사례집을 보니 생물다양성 등급이 상승하고 저수지 총질소 수치도 나아졌다. 눈에 띄게 늘어난 자잘한 생명체들을 보며 기뻐한 것도 마을 주민들이었다. 농약도 없이 무슨 수로 농사를 짓느냐며 친환경 농민들에게 헛고생 말라던 고령의 농촌 주민들이다. 그간 농사를 지으며 땅과 물이 망가지는 데 마음이 걸렸던 터라 함께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은 개인 활동을 넘어 마을 공동활동에 대한 지원이었다는 점에서 함께하는 재미, 즉 마을 활성화 차원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간 농업과 관련한 직불금이 개인 노력에 대한 지원이었다면 이는 공동의 노력에 플러스알파를 얹는 인센티브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5년 기간을 채운 39개 마을이 2026년에 지원이 종료된다. 표면적으로는 사업을 이관하고 평가 뒤에 재편한다지만 그간 농촌사업 지원들이 그래왔듯 기간이 지나면 좀 더 잘해보라 북돋기보다 사업 종료로 이어질 것이 빤하다. 마을에 친환경농업 인증 농가가 확 늘어나 서류에 각이 딱딱 떨어졌다면 모를까, 논둑에 개구리가 좀 더 뛰어다니고 주민들이 함께 풀도 매고 농약병도 치운 보람은 서류상 명확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좋은 프로그램이면 자발적으로 더 이어가라 주문하면 좋겠으나 쉽지 않다. 그간 공동활동에 대한 인센티브가 있었으므로 개인이 시간과 체력을 쓸 수 있었고, 리더들이 주민들에게 모이라 권할 수도 있었다. 하나 앞으로는 친환경 제초도 셀프, 저수지 주변 청소도 셀프라 하면 고령의 농촌 주민들이 과연 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친환경 농지는 해마다 줄어들고 기존의 친환경농민들조차 소득 저하와 기후 문제로 한계에 다다라 친환경농업을 접을까 고민하는 이때, 생물들까지 아우르라 독려하려면 돈과 시간을 써야 하고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자료집에 실린 격려사만큼, 대통령이 쓰고 농식품부 장관이 읽었던 그만큼이라도 지켜질지 지켜보는 눈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