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레플리카 할머니가 낳은 여섯 남매의 자녀들은 할머니의 무릎에 모여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의 주요 레퍼토리는 6·25전쟁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의 손을 붙잡고 서울을 떠나 오른 피란길의 기억이 밤마다 펼쳐졌다. 먹을 것을 나누어 준 낯모르는 이웃들, 첫아이를 출산한 정읍, 갓난아이를 안고 넘은 지리산, 부산에 도착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또 들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당부였다. 혹여나 다시 전쟁이 나거들랑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고, 서로를 찾지도 말아라. 전쟁 중에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전쟁이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세상을 떠난 가족과 이웃의 얼굴을 숱하게 기억하는 가족의 지침은 ‘가만히 있으라’였다.지난 12월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국회로 달려갔다. 국회에 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노동으로 일구는 이 사회를 언제...